모두 '축구'에만 열광해야 하는가?
한국-폴란드전이 있던 날… 난 문학기행을 떠났다


홍성식 기자hss@ohmynews.com

기자는 경상도에서 태어나 철들 때까지 거기서 자랐다. 팔자에 없었던 전라도 대학으로의 진학. 이상한 선입견 탓에 친구들이 걱정하던 '지역차별'은 어디에도 없었다. 빛고을 광주 사람들은 따뜻했다. 그러나, 프로야구 경기가 부산 사직구장이나 광주 무등경기장에서 열릴 때만은 아니었다.

박정태를 '용두산 탱크'로, 선동렬을 '무등산 폭격기'로 부르는, 상대방을 향한 무지막지한 적의(敵意)가 무섭고, 두려웠다. 전두환 소장이 주도한 독재권력이 왜 프로야구단을 '지역'에 안배해 창단했는지가 새삼스럽게 느껴진 순간들이었다.

상대방 선수를 실은 버스가 돌세례를 받고, 심지어 불타는 모습들. 기자는 그때부터 '스포츠'에 대한 일체의 관심을 끊었다. 그것이 야구건, 축구건, 농구건.

6월4일 한국과 폴란드의 월드컵 축구경기가 열린다고 했다. 대형 멀티비전이 설치된 광화문의 광기(?)를 피하고 싶었다. 집단무의식이 야기한 괴이한 이상열풍의 거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한국 전체에 술렁이는 '1승'과 '16강'의 피조된 신화를 보기 싫었다.

 
▲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이 안치된 무량사에서의 이문구. ⓒ 오마이뉴스 홍성식
하여, 기자는 떠났다. 충청남도 보령. <관촌수필>과 <매월당 김시습>의 작가 이문구의 고향. 송파구청에서 개설한 문학강좌를 듣는 아주머니 20여명, 단국대와 협성대, 한남대 문예창작과 학생들 50여명과 함께였다.

'스포츠'와 '문학'의 가장 극명한 차이는 무엇이던가? 그것은 짧은 시간 뜨겁게 심장을 울리는가 또는, 오랜 시간 동안 은은한 향기로 가슴에 남는가의 차이가 아니던가. 4500만 국민 모두가 월드컵 열풍에 휘둘려야 마땅하다는 천박한 언론의 프로파겐다를 뒤로 하고, 70여명의 '느리고, 우둔한 사람들'은 오전 10시 보령행 버스에 올랐다.

이문구가 직접 안내한 문학기행은 의미 깊었다. <관촌수필>의 문학적 무대가 된 충남 대천시 '관촌마을'에 가서 작가의 생가를 확인하고, 그로부터 어린 시절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닭을 300마리나 키우는 부농(富農)이면서도, 사랑방에 기거하는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천금보다 소중한 손자에겐 싱싱한 달걀이 아닌, 곯은 달걀만 주던 '타애(他愛)'를 실천하던 이문구의 할아버지와 자신의 '목숨'을 담보해 신념을 지켰던 이문구의 아버지와 형들.

소설집 <내 몸은 너무 오래 서있거나 걸어왔다>를 잉태시킨 청라저수지 옆 가난한 마을. 집필실이 있는 그 마을에서 촌로(村老)들과 너나들이로 막걸리잔을 건네며 쓴 것이 바로 <내 몸은...>. 2000년 가을 이문구는 기자와의 인터뷰에 이런 말을 했던가.

"내 소설은 구름 위가 아닌 땅 위에 있다". 그 말을 들으며 유장한 그의 문장과 능수능란한 그의 문체가 발원한 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던 기억이 새삼스러웠다.

그러나, 2002년 6월5일 저녁 8시30분 이문구 할아버지와 타애와 이문구 아버지의 신념과 이문구의 문장도 축구를 이기지는 못했다. 문학기행의 숙소인 충남 임해수련원에서, 식사를 하러 들어간 횟집에서 혹은, 달큰한 시골커피가 그리워 들어간 다방에서도 모두는 텔레비전 화면에만 눈길을 주었다.

아, 그때 기자가 떠올린 생각.

작품의 어디에서도 인간끼리의 적대적 모순을 드러내지 않는 온화한 이문구의 소설과 가상된 피조물일망정 적이 있음으로써만이 가능한 스포츠. 그 아득한 차이에서 오는 혼란과 혼돈. 1승과 16강이라는 '눈에 보이는 사과' 월드컵 축구와 인간의 삶을 위무한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과' 문학. 그 둘의 가치판단을 내리기가 몹시도 곤란한 딜레마에로의 봉착.

그때 독일과의 축구경기에서 8-0으로 패한 사우디아라비아의 골키퍼 모하메드 알데아예아의 "(축구에)지긴 했지만, 세상이 끝난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동시에 떠오른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스포츠는 스포츠이고, 축구는 축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6월4일 한국이 폴란드를 이겼지만 깨어난 다음날 아침 우리에겐 대체 무엇이 변했나? 6월10일 다시 한국이 미국에게 '축구'를 이긴들 또 무엇이 변할까? 불합리한 한미행정협정? 아시아를 향한 미국의 패권주의?


▲ 충남 대천 '관촌마을'에 이곳이 <관촌수필>의 무대임을 알리는 조형물이 서 있다. ⓒ 오마이뉴스 홍성식

한국이 폴란드를 이기던 6월5일 밤. 광화문과 대학로에서 혹은, 여관과 횟집과 다방에서 "필승 코리아"가 외쳐지던 그 밤. '짧은 시간 뜨겁게 심장을 울리는' 축구와 '오랜 시간동안 은은한 향기로 가슴에 남는' 문학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이문구는 황선홍도 유상철도 아니다. 그러나, 서른이 갓 넘은 그들이 단 하루 발을 놀려 받는 전국민적 환호와 찬사를 보며, 묵묵히 40년을 '문학'이란 한 길을 걸어온 육순노인 이문구의 쓸쓸한 눈빛에서 슬픔을 느낀 것은 비단 기자만이었을까? 



2002/06/05 오후 7:46:39